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벌지 전투 (문단 편집) == 개요 == >"절대적으로 판세가 불리할 때는 [[올인|한 장의 카드에 모든 것을 걸어 보는 모험]]도 해 볼 만하지 않겠는가?" >---- >[[알프레트 요들]] 독일 국방군 OKW 작전부장.[* 릭 앳킨슨의 서적 "벌지 대전투"를 비롯한 해외 서적들에서 비슷한 발언에 대한 언급이 있으며 휴 마셜 콜의 서적 "The Ardennes: Battle of the Bulge"에선 "그러나 지금의 상황에선 한장의 카드에 모든 것을 걸어보는 것을 겁내선 안된다.(in our present situation, however, we must not shrink from Staking Everything on One Card)"라는 좀 더 구체적이고 비슷한 발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4년 12월 16일부터 1945년 1월 25일까지 [[서부전선]]에서 이루어진 [[독일 국방군]]의 겨울 대공세로 벌어진 일련의 전투다. 아르덴 공세(Ardennes Offensive), 벌지 전투(Battle of the Bulge, 미국에서 주로 쓰이는 명칭), 또는 바스토뉴 공방전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여기서 [[벌지]](Bulge)란 '돌출부'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전략지도를 보면 독일군 전선이 서쪽으로 크게 돌출되어 있다. 벌지 전투는 서부전선에서 점점 불리해져 가고 있던 독일군이 기상 상황을 이용하여 [[총력전|모든 것을 걸고 감행한 회심의 반격]]이었다. 그리고 이 전투의 결과, 독일군은 연합군의 진격을 6주 늦추었지만 제3제국의 패망을 6개월 앞당겼다. 더불어 베를린에 서방 [[연합군]] 대신 [[소련군]]을 들이게 되는 결과를 맞이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춘계 공세]]([[에리히 루덴도르프|루덴도르프]] 대공세)의 재현이다. 처음 작전안이 제기된 후 장성급 지휘관들의 반대에 부딪히지만 참모본부에서 이를 강행하는 과정도 상당히 유사하다.[* 다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아르덴 대공세보다는 루덴도르프 공세가 독일 측에게 더 승산이 있었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평가이다.] [[임팔 작전]]과 더불어 [[보급]]을 적에게 탈취한 것에 크게 의존하려 한다면 어떤 참혹한 결말이 나는지 보여주는 전투이며, [[임팔 작전]]과 벌지 전투는 해당 전투로 인해 국가의 패배를 앞당겼다는 것도 공통점[* 다만 [[일본 제국]]의 경우 임팔 작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종전까지 [[미얀마|버마]]에서 [[영국군]]과 대치했고 점령지로 확보한 [[중국]] 본토, [[동남아시아]], [[필리핀]], 서태평양의 섬들로 인해 최전선에서 일본 본토까지의 종심은 무척 길었다. [[독일 본토 항공전|독일의 경우]]와는 다르게 [[일본 본토 공습|일본 본토에 대한 전략 폭격]]도 1944년 중반부터 시작되었고 본토 공략 준비는 미군이 [[오키나와 전투|오키나와를 점령한]] 1945년 7월 시점에서야 활성화된다. 그나마 미군은 종전 직전 [[오키나와]]까지 진출했지만 다른 연합군은 일본 본토로부터 수천km에서 떨어진 동남아시아, 태평양 곳곳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나치 독일은 1944년 9월 이후로 전쟁 전(1939년)의 독일 국경선([[지크프리트 선]], [[동프로이센]])이 전쟁의 최전선이 되어 버렸다.]이다. 그러나 승패의 결과만 공통점일 뿐, 작전 전개 과정과 미군에게 상당한 출혈을 강요한 점 등에서 차이점이 더욱 많은데 임팔 작전은 [[일본군]]은 나름대로 있을 건 다 있는, 심지어 독립만 하면 바로 [[추축군]]이나 다름없던 [[인도군]]에게 약간의 지원까지 받은 상태였는데도 [[무타구치 렌야]]가 개념 없이 일을 저질러서 다 말아먹은 거라면[* 따지고 보면 이쪽의 병크가 더 크다. 그나마 아르덴의 독일군은 미군을 어느 정도 고전시키는 전과라도 거두었지 임팔의 일본군은 90,000명이나 되는 대군 중 일부 소규모 부대의 접전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전투조차 몇 번 없이 정글에서 말라죽었다.] 독일군의 전황은 [[프랑스 침공]] 당시의 일선 지휘관들이 물러났거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자살했거나, 보다 직접적인 위협으로 판단된 동부전선에 상당수가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OKH(육군최고사령부)는 동부전선의 지휘관들을 서부전선으로 전속시키기도 했지만 아무리 유능한 지휘관이라 해도 기갑, 항공 부대의 연료와 이를 운용할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은 불가능했다. 제대로 된 훈련을 받고 풍부한 전투 경험이 있었던 정예 병력과 상당수의 기계화 전력을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이후의 [[팔레즈 포위전]], 동부전선에서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의 거듭되는 격전을 겪으면서 상실한 후였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